지금은 종합격투기, MMA가 대중화되었지만 불과 20년전만 하더라도
각 투기종목간의 대결은 흔치 않은 일이다.
서로 다른 투기종목간의 공식적인 첫 대결이라고 할수 있는
유도와 레슬링의 대결에 대해 소개하겠다.
첫 이종격투기, 유도와 레슬링의 대결
1910년, 아시아에 갇혀있었던 동양 무도는 점차 세계 무대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 도장을 열고 무도를 전수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자신의 무도가 실전에서
통하는지 검증하기 위해 도전길에 오른 이들도 있었다.
1900년대 초반, 동서양 무술 간의 충돌이 일어나던 무술의 격변기.
당시 미국의 투기종목의 주류는 복싱과 캐치 레슬링이었다.
현재 미국 대학스타일 레슬링 (포크레슬링)과 올림픽 레슬링은 관절기를 없애고 스포츠화를 한 것인데,
이들의 원류가 바로 캐치레슬링이다.
1) 다양한 관절기가 존재했고,
2) 하위 포지션으로 가면 유리한 포지션으로 뒤집거나, 빠르게 탈출하는 게 최우선이었고,
3) 상대를 넘어트린 후 빠르게 서브미션을 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미국에서, 20대 초반의 열정 넘치는 독일계 청년, 에드 산텔 (Ad Santel)도
'캐치 레슬링'을 수련하고 있었다. (175cm 84kg)
어린 시절부터 캐치 레슬링 수련했던 산텔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엉뚱했다고 한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는 레슬링보다는 복싱이 더욱 강하며 실전적이라는 평이 있었는데
<당시의 복싱 스탠스>
에드 산텔은 펍에서 친구들이
"이봐, 자네가 그렇게 싸움에 능하다면 레슬링 말고 복싱에 도전해보는건 어때?
복싱이야말로 최강에 가장 근접하지."
라고 할 때 마다
"얼간이같은 소리, 패싸움을 할 게 아니라면 1:1에서는 그래플링이 가장 강하다.
복싱의 높은 스탠스로는 태클을 막을 수 없고, 두 팔만 휘두르는 복싱보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몸을 붙잡아 상대를 넘기는 (Catch As Catch Can) 그래플링이 최강이다."
라며 그래플링이야말로 실전 최강의 무술이라는 소리를 하고 다녔다.
에드 산텔은 모든 기술들은 육체의 강인함을 바탕으로 나온다고 생각하였으며,
일찍이 이민자들로부터 접하였던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중국식의 무술에는 크게 실망하였다.
에드 산텔은 훗날 "신체의 순발력, 근력을 이용하지 않고 손동작으로만 상대방을 비튼다거나
꺾는다거나 하는 쇼는 내가 볼 때에는 모두 거짓" 이라며 "절대 밸런스와 근력운동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더욱 빠른 태클을 위해 나무 인형을 세워놓고
바지만 입은 채로 땀을 뻘뻘 흘리며 좌우로 태클 연습을 하는 모습이 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에드 산텔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한다.
1910년 중반, 시애틀에 일본 유도 4단, 미야케 타로가 정착하고 호신술로 인기를 얻자
에드 산텔은 곧장 도전 신청을 하게 되었다.
에드 산텔은 구경꾼들이 보는 앞에서 강력한 하단 태클과 슬램으로 미야케 타로를 넉아웃 시켜버렸다.
미야케 타로는 시합 후 30분 동안 어지러움을 호소할 정도로 산텔은 강력했다.
손쉽게 승리하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유도의 기술이 자신이 수련한 캐치 레슬링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은
에드 산텔은 미야케 타로를 조롱하지 않고 존중해 주었으며,
더욱 강한 유도가를 불러달라는 말을 남겼다.
'콘데 코마' 주짓수의 창시자 마에다 미츠요 (가장 우측)와
강도관 유도 5단 이토 토쿠고로 (우측에서 두번 째)
그리하여 찾아온 상대는 당시 일본에서 폭발적이게 성장한 강도관 유도 (현대 유도의 전신이 강도관 유도이다.)
5단의 명장 이토 토쿠고로였다.
그는 주짓수의 창시자 '마에다 미츠요'의 동료답게 강력한 유술기와 굳히기가 특기였다.
당시 에드 산텔은 자신이 캐치레슬링 세계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이라고 말했고,
이토 토쿠고로 역시 세계 유도 챔피언이라고 응수했다.
이 승부에서 에드 산텔과 이토 토쿠고로는 1승 1패를 주고받았다.
이토 토쿠고로는 그래플링에서 회심의 팔가로누워꺽기 (Ude-hishigi-juji-gatame, 암바)
를 에드 산텔에게 시도했지만 "이 기술은 캐치 레슬링에서도 익숙하다"며
바지깃을 잡고 몸을 틀어 풀어내었다.
이 경기들은 아무리 룰이 비슷하다고 해도 엄연히 유도 룰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토 토쿠고로는 1승을 기록했지만 고개를 떨구었다.
이후 이토 토쿠고로는 마에다 미츠요와 브라질로 건너가 쥬쥬츠(주짓수 Ju-Jit-Su)라는 이름으로
유술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
한 편 일본 강도관에서는 난리가 나고 있었다. 강도관 유도 5단의 이토 토쿠고로마저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강도관의 가노 지고로는 빠르게 5단인 사카이 다이스케를 미국에 보내지만
에드 산텔 아킬레스 홀드로 사카이 다이스케를 꺾어버렸고, 에드 산텔은
매일 시애틀 항구에서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강도관에서 올 강자를 기다렸지만
그 뒤로 강도관에서는 도전자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에드 산텔은 캐치 레슬링의 강함과 실전성을 증명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유도의 본고장 일본으로 갔다.
에드 산텔은 일본에서 대회를 제안했는데, 강도관의 가노 지고로는
대회 참가를 거부하고 제자들에게 싸우면 퇴출시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혈기왕성한 제자들은 서양인에게 유도의 강함을 보여주기 위해 기어코 참가하였는데
바로 5단의 '히쿠 쇼지'와 '나카타 레이지로' '시미즈 히토시'를 비롯한 5명이었다.
모든 종류의 잡기, 서브미션을 허용한 룰로 도쿄 야스쿠니 신사 앞 1만 여명의 군중들 앞에서 시합은 열렸다.
에드 산텔은 토너먼트 식으로 덤비는 5인 모두를 캐치 레슬링으로 꺾어버렸다.
강도관 유도 5단의 사범 히쿠 쇼지는 "하단공격 (태클)이 정말 빨랐다. 무도의 길은 다르지만
대가의 경지에 오른 자와 붙어 영광이었다." 라고 말했다.
이 대회 이후에 일본에서 캐치 레슬링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고, 수많은 일본인들이 캐치 레슬링을 배우기 위해
해외로 떠났는데, 산텔에게 도전한 유도가들은 사실상 강도관에서 쫓겨나게 되고 그 중 일부는 산텔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함께 훈련하였다. 그들 중 하나였던 히쿠 쇼지는 일본 자유형 레슬링의 선구자가 되었다.
에드 산텔은 이후에도 강자들을 찾아 도전하였으며 10여 명의 유도가, 터키의 레슬러, 인도인 레슬러들을
더 꺾었다. 에드 산텔은 1966년 숨을 거두었다.
에드 산텔 저 <캐치 레슬링 교본> 1923년
'더블 리스트록' 이라고 불리는 기술로, 유도에선 팔얽어비틀기
주짓수에서는 1951년, 기무라 마사히코가 엘리오 그레이시를 이 기술로 꺾자
'기무라 락' 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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